아마도 이십대 후반 IMF 시절이었던 것 같다.
공부 그만하고 취직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취업 박람회에도 가보고, 취업 사이트도 기웃거리다가
몇몇 기업에 이력서라는 것을 처음 내보았다.
이력서에는 반드시 자기소개서를 첨부하라 되어 있었고,
그 밖에 영어성적표, 성적증명서, 졸업증명서 등도 함께
보내라고 되어 있었다.
이 땅에서 노동자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은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절차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어떤 곳은 아예 서류전형조차 통과 못하고,
그 중 한 곳은(무슨 건설 관련 공기업으로 기억되는 데)
필기시험까지 보게 해놓고, 그리고 합격했다고 통보까지 해 놓고,
한달 정도 있다가 공기업 구조조정으로 인한
채용 무기한 보류 통보를 보내 오기도 했다.
더 웃긴 곳은 한 방송국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역시 필기시험 합격했다고 면접 보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갑자기 대뜸 영어 할 줄 아냐고 묻더라.
그래서 잘 못한다고 했더니,
면접관은 능글능글 미소 지으며 영어로 의사소통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하다며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 면접관이 영어로 질문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물어 보지 말라고 했더니, 이런 내 태도에 면접관은
나보다 더 황당해 하며 왜 그러냐고 묻더라.
나는 정말 짜증나는 투로 서류전형에 첨부한 토익 성적 참고하면
되지 않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물론 나는 그 방송국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 후로는 서류전형조차 안되는 일이 많아서, 한동안 취직을 포기했었는데,
은행에 다니는 어떤 선배가 이력서 한번 가져 와 보라고 해서 가져갔더니,
선배 왈, 무슨 이력서가 이 모양이냐고 야단이었다.
이력서에는 온통 자기 단점 투성이고 장점은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이런 이력서를 보고 누가 너같은 놈을 채용하겠냐고 하면서,
이력서하고 자기소개서 다시 써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서류전형 통과시켜 준다나....
물론 나는 선배에게 다시 이력서를 보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런 지저분한 절차를 조금만 거쳐도 되는
곳에 취직이 되어 이 땅의 먹물 노동자가 되긴 했지만,
상품가치도 별로 없고, 자기피알도 할지 모르는 '나'란 놈의
먹물 노동자 생활은,
그런 거짓부렁을 좋아하는 이 사회에서는
그저 심신이 고달플 뿐이다.
"오늘 우리가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는 건 우리가 자신을 상품이라 여기기(규정하고 취급하고 처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훌륭하게 살 수 있다."
라고 한 김규항 선생의 말씀은
상업적인 사회에서 상품가치 없어 의기소침한 나를 위로한다.
20051223 비빔밥
# by 양푼비빔밥 | 2005/12/23 13:31 | 트랙백(1) | 덧글(0)